태평양 한가운데 고립된 땅, 거대한 석상 앞에서 나는 인간의 흔적을 마주했다
'이스터 섬'이라는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뛰었습니다.
태평양의 작은 점 하나 같은 이 섬에
사람보다 큰 석상, 모아이(Moai)가 800개 넘게 서 있다는 사실은
어릴 적부터 상상 속에 자리한 신비 그 자체였죠.
그래서 이스터 섬은 내 오랜 버킷리스트 1순위였습니다.
막상 도착해 보니,
모아이보다 더 인상 깊은 건
그 섬이 가진 침묵과 고요의 결이었다는 걸
금세 알게 되었습니다.
이스터 섬, 그 신비한 고립의 시작
칠레 본토에서 5시간 넘게 비행해야 닿는
태평양 외딴섬, 라파누이(Rapa Nui).
‘세계에서 가장 고립된 유인섬’이라 불리는 이곳에선
인터넷도 느리고, 시계보다 하늘빛을 보는 게 더 정확했습니다.
섬에 도착한 첫날 밤,
별이 하늘에 쏟아져 내리는 듯했고
모든 것은 고요했지만
그 속에서 오히려 생명력이 진하게 느껴졌습니다.
아후 통가리키, 해 뜨는 모아이들의 줄지어 선 기도
가장 유명한 모아이 군집은
아후 통가리키(Ahu Tongariki)입니다.
15개의 모아이 석상이 동쪽을 바라본 채
일렬로 서 있습니다.
그들의 시선 앞에서
아침 해가 떠오를 때
나는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.
수백 년 전 사람들이 왜, 어떻게,
이토록 거대한 석상을 만들었는지는 미스터리지만
그곳에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
인간의 의지와 믿음이 전해졌습니다.
라노 라라쿠, 모아이들의 탄생지에서 본 멈춘 시간
라노 라라쿠(Rano Raraku)는
모아이를 만든 화산석 채석장입니다.
산등성이와 초원에는
제작 도중 멈춰 선 모아이들이
고개를 반쯤 파묻은 채 남아 있었어요.
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,
혹은 이미 그 자리에 만족한 듯한 모습으로.
그건 단순한 조각상이 아니라
과거에 멈춰 선 ‘시간’ 자체였습니다.
모아이 앞에서 묻게 되는 질문들
“누가 만들었을까?”
“왜 만들었을까?”
“그들이 떠난 이유는?”
이스터 섬은 답보다 질문을 주는 곳이었습니다.
그리고 그 질문들은
오히려 나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들이었죠.
“나는 지금 무엇을 만들며 살고 있을까?”
“무엇을 남기고 싶을까?”
모아이를 마주한 나는
그 석상이 아니라,
내 안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.
시간이 멈춘 듯, 그러나 감정은 선명한 섬
섬엔 카페도, 시장도 있지만
그것조차도 정해진 흐름 없이 움직였습니다.
길을 걷다 보면 말이 나타나고,
모아이 뒤로 바람이 지나가고,
아이들이 파도 소리 속에서 웃습니다.
그 안에서는
모든 것이 멈춘 것 같은데
정작 나의 감정은 더 또렷해지는 역설을 경험했어요.
돌아가는 길, 섬이 남긴 감정은 ‘존재의 무게’였다
이곳은 화려하지 않고,
편리하지도 않지만
그만큼 묵직한 감정을 남기는 곳이었습니다.
모아이는 말이 없었지만
그 침묵은 내 안에서 오래 울렸고,
바람은 대답 대신 시간을 흘려보냈습니다.
버킷리스트가 하나 지워졌지만
마음속에는 오히려
또 하나의 깊은 질문이 새겨졌습니다.
“내가 진짜 남기고 싶은 건 무엇인가요?”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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