9,288킬로미터의 창 너머, 움직이는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고요를 만나다
하루 이틀이면 도착하는 시대에
일주일을 열차 안에서 보낸다는 건
시간을 거슬러가는 일처럼 느껴졌습니다.
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,
총 9,288킬로미터를 달리는 시베리아 횡단열차.
그 안에서 나는 하루하루 창밖의 변화를 지켜보며
도착보다 '과정'에 집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.
이 글은 그 7일간의 조용한 창밖 기록입니다.
Day 1: 모스크바를 떠나며, 문명에서 자연으로
정시에 출발한 열차는
도심의 아스팔트와 회색 건물들을 천천히 뒤로 밀어냈습니다.
창밖에는 자작나무 숲이 스쳐가고
어느새 풍경은 색을 잃은 듯 무채색이 되었습니다.
모스크바의 시간은 시계처럼 정확했지만
열차 안의 시간은 천천히 늘어지고 있었습니다.
시계보다 창밖 하늘의 색으로
하루를 읽는 연습을 시작했죠.
Day 2: 하루 종일 자작나무
오전, 오후, 저녁 모두 자작나무였습니다.
끝없이 펼쳐진 흰 나무 기둥들 사이로
간간이 호수가 비치고, 작은 마을이 불쑥 등장했다 사라졌습니다.
자작나무 숲이 반복되는데도
질리지 않았던 이유는
그 안에서 계절과 시간의 변화를
아주 미세하게 읽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.
창밖은 같아 보이지만
내 마음은 조금씩 변하고 있었어요.
Day 3: 정차역, 낯선 풍경과 짧은 만남
오후쯤, 크라스노야르스크 역에 잠시 정차했습니다.
창밖으로는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들고
잠깐 숨을 돌리는 승객들.
한 할머니는 베리 파이를 팔고 있었고,
아이들은 눈 위에서 썰매를 끌고 있었습니다.
열차 문이 열리고 닫히는 그 몇 분 동안
어떤 이의 삶이 잠깐 내 풍경이 되었다가
다시 멀어져 갔습니다.
Day 4: 바이칼 호수, 고요함의 절정
창문 너머로 갑자기 푸른빛이 확 펼쳐졌습니다.
바로 바이칼 호수.
끝이 보이지 않는 호수는
바다처럼 넓고 하늘을 닮은 색이었습니다.
얼음으로 덮인 호수 위에
새들이 앉아 쉬고 있었고
그 풍경은 숨을 참게 할 만큼 고요했습니다.
가장 깊은 호수 앞에서
나는 내 안의 소음을 잠시 내려놓았습니다.
Day 5: 열차 안의 하루가 익숙해질 때
이제 열차 생활은 제법 익숙해졌습니다.
차이를 우려 마시고, 책을 읽다 졸고,
같은 칸 사람들과 짧은 인사를 나누며
소음 없는 관계를 유지했습니다.
열차는 작은 사회였고,
그 안에선 누구도 서로를 방해하지 않았습니다.
속도가 느려지니
말보다 분위기가 중요해졌고
눈빛이 대화가 되기도 했습니다.
Day 6: 익숙한 풍경, 그러나 마음은 다르다
또 자작나무, 또 하얀 눈, 또 같은 열차 소리.
하지만 처음 봤을 때와는 다르게
지금은 그 반복이 익숙하고 위로가 되었습니다.
마치 누군가의 손길처럼
부드럽고 일관된 리듬.
창밖은 바뀌지 않지만
그 풍경을 바라보는 내 시선은
어느새 더 부드럽고 단단해졌습니다.
Day 7: 도착, 그러나 어딘가에 여전히 타고 있는 마음
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습니다.
7일간의 열차 여행은 끝났지만
나는 아직도 어딘가를 달리고 있는 기분이었습니다.
이 여행은 도착지를 위한 여정이 아니었습니다.
그저 창밖을 바라보며
멈춰 있던 내 감정과 생각이
조금씩 앞으로 나아간 시간.
도시의 속도로 다시 돌아가도
그 느림의 감각은 오래도록 내 안에 남을 것 같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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